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어느 호텔방에서나 성경 한 권이 서랍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들에게 낯선 곳에서도 종교적 묵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왕이면 성경 옆에 또 다른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으면 좋겠다. 기원전 2700여 년 전에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라는 책이다.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고, 또 다른 10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며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여행담을 기록한 책이다. 고대로부터 모든 여행자들로부터 최고의 여행문학서로 손꼽혀 왔을 뿐 만 아니라, 인생여정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고전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생경한 도시의 작은 호텔방에서 우연히 펼쳐든 `오디세이아'의 한 구절이, 우리를 인문학의 심오한 여정으로 인도한다.


우리도 매일 여행을 떠난다. 시간의 여행이 될 수 있고, 공간의 이동을 동반하는 여행이 될 수 있다. 도심의 거리는 도보로, 버스로, 지하철로, 택시로, 자가용으로 이동하는 여행자가 넘쳐난다. 모두들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사방을 향해 뚫려 있는 하늘길도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으로 공항마다 북새통을 이루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의 뱃길도 여행길의 한 몫을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붉게 타오르는 가을 단풍 아래에서 우리는 또 다른 `시간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 타오르는 가을 단풍을 바라보며 우리는 일 년을 더 늙어간다.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세월의 흐름은 도도하기만 하다.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을 향해 오늘도 시간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도 여행을 떠났다. 힘든 전쟁을 겨우 마친 전우들을 데리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큰 너울과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오디세우스와 동료 여행자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다가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로토스를 먹는 사람들의 땅'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제 9권에 나오는 얘기이다.


대장 오디세우스는 3명을 부하를 보내 그 땅을 정탐하도록 명령한다. 척후병이다. 무릇 척후병은 적진의 상황을 살피고 빨리 본대에 합류해야 하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정탐의 임무를 맡았던 부하들은 그 땅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로토스'를 먹고 환각 상태에 들어갔고, 그들의 임무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장기적인 사명 뿐 만 아니라, 척후병의 보고 임무라는 단기적인 사명도 잊어버렸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자주 목격하게 되는 현상이다. 목표를 잃어버린 삶. 사명을 잊어버린 채, 하루 하루를 어제와 똑 같이 이어가는 지루한 삶. 바로 `로토스를 먹는 사람'의 생을 사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들을 찾아 나선다. 적진을 향해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다. 오디세우스 자신에게도 로토스의 유혹은 꿀처럼 달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도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망각이 주는 달콤한 마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울고불고 하면서 `로토스를 먹는 사람들의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부하들을 잡아다가, 노 젓는 자리들 밑으로 끌고가 속이 빈 배 안에 묶어 버렸다. 그러고는 다른 부하들에게 서둘러 노를 저어 그 곳을 떠나자고 명령한다.



로토스를 먹고 망각의 기운에 취해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정탐의 사명을 잊어버렸던 척후병처럼, 나는 지금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타카라는 멀지만 꼭 가야하는 평생의 목표가 앞에 놓여 있는데,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망각의 로토스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